비아그라와 함께한 사랑의 재탄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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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종동웅 작성일25-11-28 10:57 조회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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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와 함께한 사랑의 재탄생 이야기
사랑은 때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빛을 잃고, 서로 간의 감정의 간극이 점점 커질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바로 비아그라와 같은 약물이 그들의 관계에 새로운 빛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비아그라는 단순히 성기능을 회복시키는 의약품에 그치지 않는다. 그 뒤에는 인간 관계와 감정의 회복, 그리고 나아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1. 비아그라의 등장과 그 배경
비아그라는 1998년 Pfizer화이자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어 출시되었다. 처음에는 심혈관 질환 치료제로 개발되었지만, 임상 시험 중 남성 성기능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확인되면서 성기능 장애 치료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비아그라는 세계적으로 성기능 장애를 겪고 있는 남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이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비아그라의 주성분인 실데나필은 혈류를 증가시켜 남성 성기의 발기 기능을 돕는다. 이는 단순히 생리적인 작용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큰 변화를 일으킨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남성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성적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다시 찾게 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남성 개인에 그치지 않고, 파트너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다시 성적 만족을 느끼게 되면, 서로의 관계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2. 사랑의 재탄생: 비아그라의 역할
비아그라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성기능 회복에만 그치지 않는다. 성적 건강이 나빠지면서 생기는 불안감이나 자신감 부족, 혹은 파트너 간의 성적 거리감은 종종 감정적인 문제를 유발한다. 성적 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감정적인 연결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성생활의 회복은 종종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비아그라는 단순히 성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약물이 아니라, 관계의 재정립과 사랑의 재발견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 성적 만족을 느끼게 된 남성들은 자신감을 얻고, 그 결과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더욱 활발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성적 문제는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의 갈등 요소가 아니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변한다.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다시금 끌어내는 기회가 된다.
3. 사례: 비아그라와 함께한 사랑의 재탄생
다수의 실제 사례를 통해 비아그라가 어떻게 사랑을 되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60대 중반의 김 모 씨는 결혼한 지 30년이 넘은 중년의 남성이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성기능의 저하로 고민하였고, 성적인 불만이 쌓여 부부 사이의 갈등이 커져갔다. 그러나 비아그라를 복용하면서 상황은 급격하게 달라졌다.
처음 비아그라를 복용했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자신감을 느꼈고, 아내와의 관계에서 다시 젊은 시절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의 대화가 훨씬 더 깊어졌고, 다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 씨는 말했다.
이 이야기는 비아그라가 단순히 성적 회복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회복과 관계의 재탄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준다. 김 씨와 그의 아내는 성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예전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되찾을 수 있었다.
4. 비아그라의 한계와 주의사항
비아그라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재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비아그라는 신체적인 성기능 장애를 개선하는 데에 유용하지만, 심리적, 감정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만능 약은 아니다. 비아그라는 성기능에 관한 문제만 다루며, 만약 관계의 갈등이나 감정적 문제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이러한 문제들은 약물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또한, 비아그라는 심혈관 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고혈압이나 심장질환이 있는 경우, 비아그라의 사용은 의사와 상담 후 결정해야 하며, 잘못된 사용은 심각한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5. 사랑과 관계의 재건
비아그라는 결코 단순한 성기능 회복을 넘어, 사랑과 관계의 재건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성적인 불만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은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감정적인 유대감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 비아그라는 그저 육체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 연결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로 인해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되살려줄 수 있다.
결국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비아그라는 육체적 연결을 회복시켜주는 도구일 수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비아그라와 함께한 사랑의 재탄생 이야기는 그 자체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 사랑의 재탄생: 비아그라 이후의 변화
비아그라가 단지 성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50대 후반의 박 모 씨는 결혼한 지 28년이 되었지만 성적 문제로 아내와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비아그라를 처음 복용하면서 기대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경험했다.
비아그라를 복용하기 전에는 성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이 우울했어요. 아내와의 관계도 점점 어색해졌고, 대화도 적어졌죠. 그런데 비아그라를 사용하고 나서, 단순히 성적 활동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다시 아내와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원하는 것, 느끼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죠.
박 씨의 경험은 비아그라가 어떻게 관계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육체적인 회복을 넘어서서, 두 사람은 성적인 만족감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다시 돌보게 되었다. 비아그라 덕분에 부부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성적 만족도가 높아지면, 두 사람은 더 자주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며,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비아그라는 단지 약물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성적 문제로 인해 침체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7. 비아그라의 사회적 인식 변화
비아그라는 출시 초기에는 주로 노년층 남성들만 사용한다고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세대에게도 점차 인식이 확산되었다. 특히 스트레스나 불안으로 인한 성기능 장애를 겪는 이들이 증가하면서, 비아그라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약물로 자리 잡았다.
또한, 비아그라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성적인 문제를 가진 남성들이 이를 치료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지금은 이런 문제에 대해 더 개방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성적 건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비아그라는 단순히 치료약에 그치지 않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도구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성적 건강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데 기여한다. 사람들이 성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자체가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아그라는 단지 성기능을 회복하는 약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 비아그라의 사회적 가치: 관계의 회복을 넘어
비아그라가 사랑의 재탄생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이미 여러 사례에서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단지 개인의 성적 회복에 그치지 않는다. 비아그라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가정 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많은 부부들이 성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료를 받고 상담을 받으며, 비아그라와 같은 약물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이는 단지 성적 만족감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시키고, 갈등을 해결하며, 더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비아그라와 같은 의약품은 성적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희망을 제공한다. 예전에는 성적 문제가 나이와 관계없이 다루어지지 않거나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제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다. 성적 건강을 돌보는 일이 곧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파트너와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다질 수 있는 기회임을 알게 된 것이다.
9. 결론: 비아그라와 사랑의 회복
결국, 비아그라는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약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재탄생, 관계의 회복, 그리고 삶의 질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로 자리잡았다. 비아그라는 수많은 부부와 개인들에게 성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성적 건강을 회복하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자신감을 얻고, 상대방과의 소통을 강화하며, 감정적인 유대감을 다시 형성한다. 비아그라는 단지 성기능의 회복을 돕는 것을 넘어서,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가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비아그라는 그 사랑을 재탄생시키는 중요한 도전이 될 수 있다.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비아그라는 그 이해와 지지의 시작을 돕는 중요한 열쇠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기자 admin@slotnara.info
KBS환경스페셜은 2003년 4월 16일 ‘2003 밀렵보고서!-이유 없는 죽음’ 편을 내보냈다. 당시 취재팀은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 오소리, 구렁이, 고라니의 영양소 분석을 의뢰했다. 영양학적으로 돼지보다 못한 결과가 나왔다. 한국성과학연구소에 성기능 효과 즉 발기력 검사(리지스캔)도 맡겼다. 실험 대상 성인 남성 6명에게 아생 동물 추출액을 하루 세번 7일간 먹게 한 뒤 검사했다. 남성호르몬은 별 변화가 없었다. 이중 2명은 발기력이 오히려 떨어졌다. 대신 콜레스테롤은 모두 증가했다. ‘정력과 보신’을 위해 천연기념물, 멸종위기 동물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던 밀렵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을 고발하려고 실험으로 ‘야생동물=정력’이라는 허구를 깨뜨린 것이다.
‘정력과 보신’, 그리고 올무
KBS환경스페셜은 2003년 4월 16일 ‘2003 밀렵보고서!-이유 없는 죽음’ 편 실험 결과 그래프다. 야생동물 게임몰 을 먹은 결과 남성호르몬은 별 변화가 없었다. 발기력도 변화가 없거나 떨어졌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실험대상 모두 증가했다. 환경스페셜 갈무리
2005년 기준 전국 밀렵꾼은 1만6000여 명이다. 당시 밀렵꾼들이 주로 사용한 장비는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하여 만든 올가미’인 올무다. 쇠 냄새를 싫어하 황금성게임랜드 는 동물들을 유인하려고 올무를 물에 끓인 뒤 설치했다. 2005년, 2010년엔 반달곰이 이 올무에 걸려 죽으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8월 19일 암투병 끝에 별세한 양시종은 이 야생 동물 포획용 올무 제거의 대표 인물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녹색연합의 야생동물 서식지 보전 활동에 앞장섰다. 녹색연합은 별세 뒤 “그가 제 바다이야기2 거한 올무 덕분에 얼마나 많은 동물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을까요”라며 추모했다. 녹색연합 사람들은 그를 “가장 먼저 현장을 찾고 마지막까지 지켜온 인물”로 기억했다. 올무 제거를 함께 다닌 녹색연합 전문위원 서재철(당시 자연생태국 국장)은 “야생동물 보호 운동 현장을 가장 많이 누빈 대표적 활동가”라고 했다.
2001년, 2004년, 20 오션릴게임 07년 녹색연합 소식지에 나온 양시종의 글과 대담, 녹색연합 사람들의 전언 등을 재구성했다.
양시종 덕에 수많은 동물이 죽음 위기에서 벗어났다
양시종은 야생동물 보호 운동 현장을 가장 많이 누빈 대표적 활동가다. 2000년대 초반 올무에서 구한 토끼를 안고 읶다.(왼쪽) 2007년 지리산국립공 천왕봉 근처 나무에 설치된 올무를 제거하는 모습을. 녹색연합 제공
양시종은 1965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 뒤 암벽 등반에 취미를 붙이면서 산을 자주 다녔다. 가는 곳곳 벌어지는 자연 파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1990년대 중반 녹색연합 자원활동가로 ‘백두대간 생태 보전’ 일을 시작한다. 서재철은 “암벽 등반을 하다 산악인의 길로 가지 않고, 자연과 동물 보호로 나간 특별하고 예외적인 활동가”라고 했다. 양시종은 산을 잘 타고, 산을 잘 알며, 산을 사랑하던 최적격의 자원봉사자이자 활동가였다. 그는 2013년까지 여러 곳에서 생태 보전 활동을 이어갔다.
현장 활동 외 기간엔 건축 일을 했다. 직접 집을 만들었다. 이 밥벌이에도 기준과 원칙이 뚜렷했다. 콘크리트 건물은 짓지 않았다. 자연 친화의 목재집, 황토집을 주로 지었다. 재주 많은 양시종은 지게차 일도 했다. 광양제철에서 지게차 기사를 할 때는 월급도 많이 받았다. 2주에 한 번 쉬는 게 걸림돌이었다. 자주 못 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산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산에는 가고 싶은데, 안 되겠더라고요. 결국 그만두고 바로 올라와서 산을 탈 수 있는 직업을 택했지요. 나는 꼭 살만하다 싶으면 산을 찾게 되고, 잘 된다 싶으면 꼭 하나씩 일이 터져요.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아, 산에 가야겠다’(웃음) 그랬죠.”
야생동물 길목 덫과 올무가 떠오르면 산으로 가다
인적 드문, 등산로를 벗어난 곳에 설치된 올무와 덫 제거는 고되고, 위험한 일이다. 사람이 덫에 걸려 다칠 때도 있다. 2000년 초반까지 겨울 백두대간은 영하 30도 가까이 떨어지곤 했다. 양시종은 이런 강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올무와 덫을 찾아다녔다. 돈을 버는 일도, 세상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걸까” 하고 회의도 했다.
산을 벗어나 있을 때면 산 동물, 죽은 동물이 눈에 밟혔다. 야생동물들이 다니는 길목을 노리는 수많은 덫과 올무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겨울 눈으로 뒤덮인 하얀 산등성이에 올무에 죽은 오소리와 주변 둥그런 몸부림의 핏자국을 잊을 수 없었다. 밀렵꾼들은 동물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히는 겨울 눈밭에서 더 설쳐댔다. 올무가 걸려 뒷발길질에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곤두박질친 재 몸부림치는 토끼의 모습을 볼 때면 “사람이라서 미안하다. 내가 놓은 건 아니지만, 그것을 놓은 것이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라며 자책했다.
산을 오가며 야생의 생명과 맞닥뜨릴 때는 고됨을 잊어버릴 정도로 감동과 기쁨에 빠져들었다. “고라니나 노루 같은 것은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그렇게 이쁜 애들을 잡아먹는 거는….” 보신과 정력 보강한다고 잡아먹었다. 2000년대 중반 전후 천연기념물 제217호 산양의 거래가는 500만~1천만원이었다.
사람들이 야생에 자꾸 간여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들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야생 동물이니까요.”
인간이 야생에 간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평생의 소신이자 원칙이었다. 서재철은 “자연과 야생동물 보호에 관한 문제라면 한 치도 양보 않는 원칙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양시종은 자신에게, 또 주변에 엄격했다. 서재철은 ‘원칙’에 관한 일화도 전했다.
자연과 야생동물 보호라면 한 치도 양보 않는 원칙주의자
양시종은 2005년쯤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몇몇 주민과 국유림을 빌려 곰취나물, 참나물 등을 재배했다. “어느 날 아침에 새벽에 전화 와서 막 노발대발 화를 내는 거예요. 사람들이 수익에 좀 더 눈이 멀어서 거기다가 비료 뿌리고 농약을 쓰더라는 거예요. 백두대간 산촌에서 재배한 곰치라면 농약과는 거리가 멀어야 할 텐데 하면서요.”
양시종은 ‘국립공원 케이블카 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암벽등반가이기도 한 그는 2010년 11월 14일 오후 북한산 국립공원 인수봉 절벽에 가로 10m, 세로 32m의 대형 펼침막을 설치할 때는 총감독을 맡았다. 녹색연합 제공
녹색연합에서 올무와 덫 제거 말고도 여러 일을 했다. 이 단체 녹색친구와 녹색등산학교 창립 멤버 겸 강사로도 일했다. 서재철은 “지속 가능한 등산 행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학교 운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국립공원 케이블카 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2010년 11월 북한산 국립공원 인수봉 절벽에 가로 10m, 세로 32m의 케이블카 반대 대형 펼침막 퍼포먼스를 진행할 때 설치·기획·총감독을 맡았다. 서재철은 “고층 건물 건축 현장 경험과 달인 수준의 암벽타기 실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에도 참여했다.
서재철은 “양시종 선배는 야생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했다. 요즘 말로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데 삶과 일상을 오롯이 바쳤다”고 평가한다. 이어 말했다. “무엇보다 심성이 맑고 순한 분이었습니다.”
[생사고투]는 세상에 덜 알려진 채로 또는 무명으로 묻힌 이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과거나 동시대 게시일 즈음 출생하거나 사망한 이들이 생전 겪은 고투를 전합니다. 지금 죽음에 맞서 싸우는 생존자들 이야기도 들려 드립니다.
☞ 기획·연재
‘정력과 보신’, 그리고 올무
KBS환경스페셜은 2003년 4월 16일 ‘2003 밀렵보고서!-이유 없는 죽음’ 편 실험 결과 그래프다. 야생동물 게임몰 을 먹은 결과 남성호르몬은 별 변화가 없었다. 발기력도 변화가 없거나 떨어졌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실험대상 모두 증가했다. 환경스페셜 갈무리
2005년 기준 전국 밀렵꾼은 1만6000여 명이다. 당시 밀렵꾼들이 주로 사용한 장비는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하여 만든 올가미’인 올무다. 쇠 냄새를 싫어하 황금성게임랜드 는 동물들을 유인하려고 올무를 물에 끓인 뒤 설치했다. 2005년, 2010년엔 반달곰이 이 올무에 걸려 죽으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8월 19일 암투병 끝에 별세한 양시종은 이 야생 동물 포획용 올무 제거의 대표 인물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녹색연합의 야생동물 서식지 보전 활동에 앞장섰다. 녹색연합은 별세 뒤 “그가 제 바다이야기2 거한 올무 덕분에 얼마나 많은 동물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을까요”라며 추모했다. 녹색연합 사람들은 그를 “가장 먼저 현장을 찾고 마지막까지 지켜온 인물”로 기억했다. 올무 제거를 함께 다닌 녹색연합 전문위원 서재철(당시 자연생태국 국장)은 “야생동물 보호 운동 현장을 가장 많이 누빈 대표적 활동가”라고 했다.
2001년, 2004년, 20 오션릴게임 07년 녹색연합 소식지에 나온 양시종의 글과 대담, 녹색연합 사람들의 전언 등을 재구성했다.
양시종 덕에 수많은 동물이 죽음 위기에서 벗어났다
양시종은 야생동물 보호 운동 현장을 가장 많이 누빈 대표적 활동가다. 2000년대 초반 올무에서 구한 토끼를 안고 읶다.(왼쪽) 2007년 지리산국립공 천왕봉 근처 나무에 설치된 올무를 제거하는 모습을. 녹색연합 제공
양시종은 1965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 뒤 암벽 등반에 취미를 붙이면서 산을 자주 다녔다. 가는 곳곳 벌어지는 자연 파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1990년대 중반 녹색연합 자원활동가로 ‘백두대간 생태 보전’ 일을 시작한다. 서재철은 “암벽 등반을 하다 산악인의 길로 가지 않고, 자연과 동물 보호로 나간 특별하고 예외적인 활동가”라고 했다. 양시종은 산을 잘 타고, 산을 잘 알며, 산을 사랑하던 최적격의 자원봉사자이자 활동가였다. 그는 2013년까지 여러 곳에서 생태 보전 활동을 이어갔다.
현장 활동 외 기간엔 건축 일을 했다. 직접 집을 만들었다. 이 밥벌이에도 기준과 원칙이 뚜렷했다. 콘크리트 건물은 짓지 않았다. 자연 친화의 목재집, 황토집을 주로 지었다. 재주 많은 양시종은 지게차 일도 했다. 광양제철에서 지게차 기사를 할 때는 월급도 많이 받았다. 2주에 한 번 쉬는 게 걸림돌이었다. 자주 못 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산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산에는 가고 싶은데, 안 되겠더라고요. 결국 그만두고 바로 올라와서 산을 탈 수 있는 직업을 택했지요. 나는 꼭 살만하다 싶으면 산을 찾게 되고, 잘 된다 싶으면 꼭 하나씩 일이 터져요.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아, 산에 가야겠다’(웃음) 그랬죠.”
야생동물 길목 덫과 올무가 떠오르면 산으로 가다
인적 드문, 등산로를 벗어난 곳에 설치된 올무와 덫 제거는 고되고, 위험한 일이다. 사람이 덫에 걸려 다칠 때도 있다. 2000년 초반까지 겨울 백두대간은 영하 30도 가까이 떨어지곤 했다. 양시종은 이런 강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올무와 덫을 찾아다녔다. 돈을 버는 일도, 세상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걸까” 하고 회의도 했다.
산을 벗어나 있을 때면 산 동물, 죽은 동물이 눈에 밟혔다. 야생동물들이 다니는 길목을 노리는 수많은 덫과 올무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겨울 눈으로 뒤덮인 하얀 산등성이에 올무에 죽은 오소리와 주변 둥그런 몸부림의 핏자국을 잊을 수 없었다. 밀렵꾼들은 동물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히는 겨울 눈밭에서 더 설쳐댔다. 올무가 걸려 뒷발길질에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곤두박질친 재 몸부림치는 토끼의 모습을 볼 때면 “사람이라서 미안하다. 내가 놓은 건 아니지만, 그것을 놓은 것이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라며 자책했다.
산을 오가며 야생의 생명과 맞닥뜨릴 때는 고됨을 잊어버릴 정도로 감동과 기쁨에 빠져들었다. “고라니나 노루 같은 것은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그렇게 이쁜 애들을 잡아먹는 거는….” 보신과 정력 보강한다고 잡아먹었다. 2000년대 중반 전후 천연기념물 제217호 산양의 거래가는 500만~1천만원이었다.
사람들이 야생에 자꾸 간여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들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야생 동물이니까요.”
인간이 야생에 간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평생의 소신이자 원칙이었다. 서재철은 “자연과 야생동물 보호에 관한 문제라면 한 치도 양보 않는 원칙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양시종은 자신에게, 또 주변에 엄격했다. 서재철은 ‘원칙’에 관한 일화도 전했다.
자연과 야생동물 보호라면 한 치도 양보 않는 원칙주의자
양시종은 2005년쯤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몇몇 주민과 국유림을 빌려 곰취나물, 참나물 등을 재배했다. “어느 날 아침에 새벽에 전화 와서 막 노발대발 화를 내는 거예요. 사람들이 수익에 좀 더 눈이 멀어서 거기다가 비료 뿌리고 농약을 쓰더라는 거예요. 백두대간 산촌에서 재배한 곰치라면 농약과는 거리가 멀어야 할 텐데 하면서요.”
양시종은 ‘국립공원 케이블카 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암벽등반가이기도 한 그는 2010년 11월 14일 오후 북한산 국립공원 인수봉 절벽에 가로 10m, 세로 32m의 대형 펼침막을 설치할 때는 총감독을 맡았다. 녹색연합 제공
녹색연합에서 올무와 덫 제거 말고도 여러 일을 했다. 이 단체 녹색친구와 녹색등산학교 창립 멤버 겸 강사로도 일했다. 서재철은 “지속 가능한 등산 행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학교 운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국립공원 케이블카 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2010년 11월 북한산 국립공원 인수봉 절벽에 가로 10m, 세로 32m의 케이블카 반대 대형 펼침막 퍼포먼스를 진행할 때 설치·기획·총감독을 맡았다. 서재철은 “고층 건물 건축 현장 경험과 달인 수준의 암벽타기 실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에도 참여했다.
서재철은 “양시종 선배는 야생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했다. 요즘 말로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데 삶과 일상을 오롯이 바쳤다”고 평가한다. 이어 말했다. “무엇보다 심성이 맑고 순한 분이었습니다.”
[생사고투]는 세상에 덜 알려진 채로 또는 무명으로 묻힌 이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과거나 동시대 게시일 즈음 출생하거나 사망한 이들이 생전 겪은 고투를 전합니다. 지금 죽음에 맞서 싸우는 생존자들 이야기도 들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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