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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말한다.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굶주림과 사랑이다. 아난케와 에로스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아난케란 필연성의 신으로서 자기 보존의 원리를 뜻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사랑(에로스)의 영역이다. 둘 중 무엇이 더 우선적인지는 자명하겠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원리는 ‘자기 보존의 노력’(코나투스)이라고 말했던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사람 스피노자였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이 릴게임신천지 짐승과 다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조물주라면 당연히, 너희도 다른 동식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문자답의 주체가 사람이라면 수긍하기 힘든 대답이다. 사람이 짐승과 달라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보증하는 윤리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윤리가 없다면 어떤 개인의 삶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생존과 함께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런 오징어릴게임 까닭이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에로스는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2. ‘인간의 조건’(1958)에서 한나 아렌트는 사람의 신체적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노동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쓰는 것이고, 작업이란 자기 고유성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손 바다이야기게임 을 놀리는 일, 그리고 행위란 공동체의 유지와 안위에 개입하는 공적 활동이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이 세 활동은 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노동은 노예의 일이었고, 작업은 장인의 일, 행위는 정치적 주권자인 시민들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시민이라면 당연히 국가(폴리스) 운영에 관한 사무인 정치(‘행위’)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노동이나 작업은 알라딘게임 품위 있는 시민의 관심 대상일 수 없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현저한 것은 이 세 활동의 위계가 정반대로 뒤집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과 작업과 행위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는 자명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보다 우선적인 일은 없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제 손으로 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은 존중받지 야마토게임방법 못한다. 게다가 고대 시민의 전형이 전사라면, 우리 시대의 인간 전형은 상인이다. 근대인은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두문불출 작업에 몰두하는 장인도 아니다. 상인에게도 수련과 작업의 시간이 있으나 이는 모두 시장에 나가기 전의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상인이 목숨을 건다면 전쟁터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약속을 지켜서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그렇게 확보한 신용은 나의 이익과 재산이 되고, 바로 그것이 내 생명의 원천이자 행복의 근거가 된다. 그 가장 밑자리에 있는 것이 생계를 위한 인간 활동으로서의 노동인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의 마지막 절 제목을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붙였다. 여기에서 노동의 승리란 고대에 대한 근대의 승리를 뜻한다. 노동의 승리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영국의 고전경제학자들의 노동 가치설이며, 그 곁에는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동 예찬의 사상이 있다. 국부의 핵심은 노동생산성에 있고 그 바탕에는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개인들의 이기심이 있다. 인간 사회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노동이며, 목숨을 건지려 노예가 된 죽음 이하의 존재들도 노동을 통해서라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근대성의 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금언이 있다. 부지런히 일을 하라, 하늘이 너희를 도울 것이다.
아렌트가 이런 가치 전도의 역사를 책 한 권 분량으로 담아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자신도 근대의 노동 예찬에 합류하고자 했던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아렌트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노동 예찬이 만들어낸 폭력적 결과가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위나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인가.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정치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은, ‘노동하는 동물’들이 추구하는 생존제일주의의 폐해에 대한 유효한 방어가 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책의 말미에 신체 활동(Vita activa, 노동·작업·행위를 포괄한다)과 대비되는 정신 활동(Vita contemplativa) 곧 사유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조건의 궁극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고통의 감소를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는 근대의 행복주의자들을 향해, 움직이려 하지만 말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 좀 하면서 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다. 아렌트는 책의 마무리로 로마인 카토의 문장을 인용했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이 없다.” 고독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문장의 풍경은 그러나, 세상을 먹어치워 버린 실용주의와 생존주의의 무게감에 비하면 아름답지만 너무나 연약해 보이지 않는가.
3. 아렌트가 적시한 세 활동의 틀은 지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주권자로서의 ‘행위’만 했을 뿐 노동과 작업은 하지 않았다지만, 근대의 시민들은 셋 모두를 해야 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누구에게나 불가피하다. 또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생업에서 전문가이고자 하고, 공동체의 주권자로서 나름의 의무를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한 노예이고 자기 직업의 장인이며 또한 한 나라의 주권자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세 활동에는 불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노동은 나와 가족을 통해 이어지는 생명의 지속성을, 작업은 내 정신이 추구하는 고유성을, 그리고 행위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지속성을 향해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과 가족의 행복한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회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명예와 자부심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연쇄를 통해, 또한 자기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의 역사에 한 분자로 참여함으로써 우리 모두는 자연스레 거대한 연속성의 일부가 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때가 되면 내가 맞게 될 소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행복보다 우선적인 것은 보람이다. 보람은 불편과 고통을 통과해야 느낄 수 있는 충족감이다. 오늘 힘들여 몸을 움직이는 것이 세 개의 지속성과 불멸에 기여하는 일이라면, 분투와 분발과 애씀으로 이루어진 내 노동과 작업과 행위의 시간들이 아주 허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가만있자, 우리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아렌트가 강조하고자 했던 저 연약해 보이는 사유의 힘이 아닌가. 그러니까 아렌트가 상기시켜준 세 활동의 바탕에 있는 것은 고독인 것인가. 고독에 이르면 생각이 뜨거워진다. 요컨대 우리도 인간의 조건을 발판 삼아 잠시 그 고독에 합류해본 셈이겠다.
문학평론가
■ 서영채 프로필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1994∼2015). ‘동아시아 비교문학’ ‘풍경이 온다’등 집필.
■ 인물 설명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
전체주의의 작동 방식과 본질, 근대성의 정치적 성격과 윤리를 탐구한 정치철학자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아이히만 재판의 관찰기를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거대한 악이란 특별한 악의를 가진 끔찍한 괴물의 산물이 아니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춰버린 평범한 사람이 관료적 규범에 기계적으로 순응할 때, 그리고 그것이 누적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아렌트의 저서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책임 있는 시민성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거니와, ‘인간의 조건’은 근대 세계의 시민이 활동의 자유로운 주체로서 견지해야 할 윤리적 조건과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말한다.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굶주림과 사랑이다. 아난케와 에로스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아난케란 필연성의 신으로서 자기 보존의 원리를 뜻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사랑(에로스)의 영역이다. 둘 중 무엇이 더 우선적인지는 자명하겠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원리는 ‘자기 보존의 노력’(코나투스)이라고 말했던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사람 스피노자였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이 릴게임신천지 짐승과 다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조물주라면 당연히, 너희도 다른 동식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문자답의 주체가 사람이라면 수긍하기 힘든 대답이다. 사람이 짐승과 달라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보증하는 윤리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윤리가 없다면 어떤 개인의 삶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생존과 함께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런 오징어릴게임 까닭이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에로스는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2. ‘인간의 조건’(1958)에서 한나 아렌트는 사람의 신체적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노동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쓰는 것이고, 작업이란 자기 고유성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손 바다이야기게임 을 놀리는 일, 그리고 행위란 공동체의 유지와 안위에 개입하는 공적 활동이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이 세 활동은 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노동은 노예의 일이었고, 작업은 장인의 일, 행위는 정치적 주권자인 시민들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시민이라면 당연히 국가(폴리스) 운영에 관한 사무인 정치(‘행위’)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노동이나 작업은 알라딘게임 품위 있는 시민의 관심 대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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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의 마지막 절 제목을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붙였다. 여기에서 노동의 승리란 고대에 대한 근대의 승리를 뜻한다. 노동의 승리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영국의 고전경제학자들의 노동 가치설이며, 그 곁에는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동 예찬의 사상이 있다. 국부의 핵심은 노동생산성에 있고 그 바탕에는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개인들의 이기심이 있다. 인간 사회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노동이며, 목숨을 건지려 노예가 된 죽음 이하의 존재들도 노동을 통해서라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근대성의 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금언이 있다. 부지런히 일을 하라, 하늘이 너희를 도울 것이다.
아렌트가 이런 가치 전도의 역사를 책 한 권 분량으로 담아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자신도 근대의 노동 예찬에 합류하고자 했던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아렌트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노동 예찬이 만들어낸 폭력적 결과가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위나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인가.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정치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은, ‘노동하는 동물’들이 추구하는 생존제일주의의 폐해에 대한 유효한 방어가 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책의 말미에 신체 활동(Vita activa, 노동·작업·행위를 포괄한다)과 대비되는 정신 활동(Vita contemplativa) 곧 사유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조건의 궁극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고통의 감소를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는 근대의 행복주의자들을 향해, 움직이려 하지만 말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 좀 하면서 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다. 아렌트는 책의 마무리로 로마인 카토의 문장을 인용했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이 없다.” 고독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문장의 풍경은 그러나, 세상을 먹어치워 버린 실용주의와 생존주의의 무게감에 비하면 아름답지만 너무나 연약해 보이지 않는가.
3. 아렌트가 적시한 세 활동의 틀은 지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주권자로서의 ‘행위’만 했을 뿐 노동과 작업은 하지 않았다지만, 근대의 시민들은 셋 모두를 해야 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누구에게나 불가피하다. 또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생업에서 전문가이고자 하고, 공동체의 주권자로서 나름의 의무를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한 노예이고 자기 직업의 장인이며 또한 한 나라의 주권자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세 활동에는 불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노동은 나와 가족을 통해 이어지는 생명의 지속성을, 작업은 내 정신이 추구하는 고유성을, 그리고 행위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지속성을 향해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과 가족의 행복한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회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명예와 자부심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족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연쇄를 통해, 또한 자기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의 역사에 한 분자로 참여함으로써 우리 모두는 자연스레 거대한 연속성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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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 서영채 프로필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1994∼2015). ‘동아시아 비교문학’ ‘풍경이 온다’등 집필.
■ 인물 설명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
전체주의의 작동 방식과 본질, 근대성의 정치적 성격과 윤리를 탐구한 정치철학자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아이히만 재판의 관찰기를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거대한 악이란 특별한 악의를 가진 끔찍한 괴물의 산물이 아니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춰버린 평범한 사람이 관료적 규범에 기계적으로 순응할 때, 그리고 그것이 누적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아렌트의 저서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책임 있는 시민성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거니와, ‘인간의 조건’은 근대 세계의 시민이 활동의 자유로운 주체로서 견지해야 할 윤리적 조건과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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